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처드 닉슨 (문단 편집) ===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 [[파일:Why-Some-Reagan-Supporters-Did-Not-Support-Goldwater-in-1964-615x290.jpg]] 1964년 대선을 앞두고 [[배리 골드워터]]와 함께 한 모습. 가운데에 있는 사람이 바로 [[로널드 레이건]]. 이 때 레이건은 골드워터 지지 연설로 자신의 이름을 처음으로 전국에 알렸고, 2년 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 출마해서 당선되었다.[* 이 때 레이건이 꺾은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바로 62년도 선거에서 리처드 닉슨을 꺾고 재선된 펫 브라운이었다.] 그는 한동안 뉴욕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며 여론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었다. 그러던 중 1964년 선거에서 린든 B. 존슨이 [[배리 골드워터]] 후보를 압도적인 표차로 꺾고 재선에 성공하자 닉슨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전권을 골드워터에게 이양받아 대대적인 공화당 혁신 사업을 벌였다. 절치부심한 그는 다시 8년만에 대선에 출마했고, 당시 린든 B. 존슨의 어설픈 [[베트남 전쟁]] 처리 덕분에 사회 안정과 종전을 원하는 "[[침묵하는 다수]]"(Silent Majority)를 등에 업고 [[1968년]] 대통령에 당선된다. 석패할 때와 비슷하게 0.42%의 간발의 차였다. '''이 과정에서 닉슨은 절치부심 [[와신상담]]의 극치를 보여준다.''' 대중 앞에 등장할 때는 에너지 넘치는 이미지를 위해 구보로 연단 위에 뛰어 오르지를 않나, [[밀짚모자]]에 "NIXON"이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은 이른바 "닉슨 소녀"들을 등장시켰다. --시대를 앞서간 오빠부대전략-- 선거구호도 "바로 닉슨이다!(Nixon's the One!)"으로 일관적이고 긍정적이었다. ||[youtube(5V-nwG_8JTg)]||[youtube(Fc91AB7bIeU)]|| ||[youtube(5HBON-ZIyUE)]||[youtube(jEXN1SwEfkY)]|| 닉슨의 대선 당시 광고(1968년). 반면 민주당의 후보였던 [[휴버트 험프리]][* 공교롭게도 이 분 역시 부통령을 지냈다. 현직 부통령과 전직 부통령의 대결이었던 셈.]는 "베트남전 폭격 중지"라는 훌륭한 정치적 수완으로 잠시 닉슨을 앞서갔지만 선거의 초점과 선거 구호를 자주 바꾸면서 일관성을 잃었다. 무엇보다도 네거티브에만 일관한 전략이 문제였다. 이런 선거광고는 tv광고에서 정점에 달했다. 일부 포지티브 광고도 있었지만 대개 닉슨의 말바꾸기(이리저리 도는 풍향계 광고), 닉슨이 당신에게 해준건 없다라는 광고(하단의 영상), 애그"뉴"(AgNew) 부-'통령'(New President의 말장난) 조롱, 거품이 터지면서 공약을 까는 광고 등등.. 개별 아이디어는 신선했을지 몰라도, 대체 자신이 뭘 하겠다라는 것이 없었다. 심지어는 험프리가 시종일관 '''닉슨'''만 강조하며 비난하는 광고도 있었다. 최종 슬로건 역시 "험프리, 다른 대안은 '''없다'''(There's No Altenative)"라는 네거티브한 표현이었다. [youtube(tEvaI_-88SU)] [[휴버트 험프리|험프리]]의 대선 당시 광고(1968년). '''무엇보다, 닉슨은 자신의 약점인 TV 공개 토론을 거부했다!''' 결국 험프리는 대세를 뒤집지 못했고, 닉슨은 대중선거전의 승자로 거듭났다. 제3당인 미국 독립당 후보로 나선 [[조지 월리스]][* 남부출신으로 노골적으로 인종차별과 분리를 옹호해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민주당이 우세했던 남부지역의 표를 가져가 버렸다. 그리고 당시 미국 독립당의 부통령 후보가 그 유명한 [[커티스 르메이]]였다.]가 험프리의 표를 상당부분 갉아먹은 것 또한 닉슨의 당선에 한 몫 했다. 생각해보면, 1968년 경선에서 슈퍼 화요일을 [[캘리포니아]]에서 압도적으로 이겨버리며 승승장구하던 [[로버트 케네디]]가 다음날 암살당하지만 않았어도 닉슨은 또 패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는 (보수성이 옅었던 아이젠하워를 포함하면) 오랜 민주당 정권을 종식하며 대통령이 되었다. [[68혁명]] 등으로 뜨겁던 1968년이 [[프랑스]] 총선에서의 드골파 압승,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과 함께 기존 질서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는 것을 상징한다는 평이 있다. 이 선거는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정치참여의 계기가 되었다. 그가 미국에 첫발을 디딘 당시 벌어진 이 대선의 '''TV 토론을''' 입당 사유라고 회고했던게 문제. "나는 당시 자유시장과 자유기업, 그리고 작은정부를 주장했던 닉슨에 비해 험프리가 사회주의에 더 가깝다고 느꼈다."라며 "나는 그때부터 주욱 공화당원"이라고 주장했지만, 앞 주석에서 보았듯이, '''TV 토론은 없었다.''' [[http://www.vop.co.kr/A00000013001.html|이 사실이 드디어 2003년 드러났지만, 슈워제네거는 별말 없이 묻어버렸다]]. 한편, 리처드 닉슨은 이 시기 파리 평화회담으로 인기가 높아진 휴버트 험프리와 린든 존슨 정권에 타격을 주기위해 남베트남의 반 티에우 대통령이 비타협적으로 나오도록 조장했다. 여기에 중심적 역할을 한 것이 후일 국무장관이 되는 [[헨리 키신저]]. 키신저는 회담에 참석해 진행상황을 닉슨에게 보고하는 역할을 맡았고, 여기에는 중국계 로비스트 천샤오메이, 영명 안나 체놀트의 역할이 매우 컸다. 미국에서는 이 사건을 그녀의 이름을 따 '체놀트 사건'이라고 부른다. 여하간 이는 이적행위를 금하는 로건 법(Logan Act)에 위배되는 사항이었지만, 아무도, 심지어 도청을 통해 사실을 안 존슨 대통령조차도 이를 폭로하지 못했다. 물론 닉슨의 행동이 남베트남의 비타협적 태도에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지는 논란의 사항이지만, 워터게이트로 귀결되는 그 성정이 미리 드러난 부분이라할 수 있겠다. 여하간 대통령에 취임한뒤 1971년, 닉슨은 키신저를 중국으로 파견하여 [[키신저-저우언라이 회담]]을 개최, 중국의 공식 초청을 받았으며 1972년 2월에 중국을 방문해 [[마오쩌둥]]과 [[닉슨-마오쩌둥 회담]]을 가졌다. 당시 [[조지 소로스]]와 함께 퀀텀펀드를 공동창업하고 운영중이던 [[짐 로저스]]는 미국인으로써 당시 닉슨의 방중에 대해 당시 새로운 상황에 대해 대부분의 미국인들처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지만 이후 닉슨의 결정으로 인해 세상이 바뀌었다고 회상했다. 이후 [[짐 로저스]]는 불인 차이나라는 베스트셀러를 집필할 정도로 중국 투자에 앞장선 월가의 인물이 되었으며 이러한 것들은 모두 닉슨의 방중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youtube(LlurrUe3oP4)] [[베트남 전쟁]] 관련 사항은 특히 닉슨의 정치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사항이었는데, 미국인들에게 있어서 인기 없는 전쟁이 되어간다는 것을 직감한 닉슨은 아시아 국가들은 스스로 자국의 안보를 감당해야 한다면서 남베트남에서 미군들을 본격적으로 철수시킨 것에 이어서 한반도에서도 주한미군 7사단을 철군시켜 한국, 일본을 포함한 주요 아시아 동맹국들과 갈등이 벌여지기도 했다. 어찌되었든 닉슨은 베트남 철수 공약을 지켰고, 그 결과 1972년, 소수의 미군 고문단을 제외한 파월미군 50만 여명이 철수하고 북베트남으로부터 미군 포로들을 송환받으면서 닉슨에 대한 지지도는 높아지게 된다. 닉슨은 미군 철수의 정당성을 어필하기 위해 [[남베트남군]]이 스스로 싸울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 베트남화(Vietnamization) 정책을 추진했고, 이 때 기점으로 남베트남군은 양적으로 질적으로 크게 향상되었다. 한편으로 그는 강경함을 어필하기 위해 협상을 깨고 [[부활절 공세]]로 북베트남이 닉슨의 베트남화 정책에 도전장을 내밀자 [[라인배커 작전]]이라는 북폭작전을 감행하는데, 지난 [[롤링썬더 작전]]과는 달리 '''폭격 제한구역을 두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북베트남 주요 거점을 폭격했다. '''그 덕에 북베트남-중국 국경지대의 교통로와 하노이 주위의 수도권이 미군의 폭격에 완전히 박살나고 북베트남군의 전쟁 수행능력도 급감해 남베트남에 대한 공세를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소련 화물선들의 무기 공급을 중단시키기 위해 항구에다가도 무차별적으로 기뢰를 살포하는 이전과는 다른 강경한 모습을 보였다. 닉슨의 이러한 강경조치에 미군과 보수층에선 열렬한 지지를 표했지만 언론에선 민간인 피해를 이유를 들어 닉슨 행정부를 두고 야만적이라고 비판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